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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한 코레아니의 죽음: "CIA는 결국 그를 잡지 못했다."

한수경, Seoul, 2010년 12월 15일

“난 코레아니다. 하지만 난 한국엔 단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 한국전쟁 참전을 거부한 사람들을 그 당시 ‘코레아니’라 불렀다.” 맥스 왓츠(Max Watts)는 필자와의 첫 전화 통화에서 자신이 왜 징용을 거부했는가를 설명한다. “내가 왜 생전 알지도 관계도 없는 북한군인들을 죽여야 하는가?” “내가 왜 그들에게 총 뿌리를 겨눠야 하는가?”라 반문했다.

그는 20대 초의 젊은 나이에 한국전쟁 당시 전쟁거부로 미국을 떠나 평생을 떠돌며 도망자로 살았다. CIA는 평생 그의 뒤를 따랐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Max Watts”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그의 정체를 바꿨다. 사실 그의 삶은 몇 줄의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파란만장하다.

맥스란 인물은 192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토마스 슈배처(Thomas Schwätzer)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치의 오스트리아 점령으로 그의 가족은 파리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그의 가족은 비자문제로 다시 갈라져 그는 아버지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살로 어린 나이에 여러 고아원을 전전하며 전쟁 당시 탄피와 불발탄을 주어 용돈을 벌어 살았다고 한다. 12살의 나이에 영국 공산주의 소년단에 가담해 6개월 만에 구역대표까지 됐다.

16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어머니와 자매를 만났다. 미국에서 그는 정치학, 경제학과 항공술을 공부하고 정치적으로 활동하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전쟁참전을 피해 이스라엘로 갔다. 이스라엘에서 그는 다시 군대징용을 거부했다. 스위스의 주간지 보츠(WOZ, 2010년 12월 9일)가 “난 아무 한국인도 모르고, 아랍인도 모른다. 그들은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라 그의 말을 적었다. 이것이 그가 미국에서 또 이스라엘에서 징용을 거부한 이유다.

Max Watts, photo: Norman Brewer
photo: 책 커버

그렇게 그는 파리로 건너가 그곳에서 지구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강의를 한다. 특히 전자 충격파 반사를 통한 유전(석유)을 찾는 방법을 발견해 유명해진다. 그의 가명 “Max Watts”는 물리학 용어인 “MAXimum WATTage”에서 따온 즉 최대의 역량발휘란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쿠바와 알제리에서 그는 물리학자로 일했고, 알제리에선 프랑스 제국주의에 반대 알제리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다.   

60년대 중반과 70년대에 맥스는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 가담한다. 즉 미국 군부내의 저항운동인 소위 ‘RITA (Resistance inside the Army)’로 그는 유명하다. 그 당시 징용을 거부하거나 탈영한 미군들을 유럽 국가들이 망명자로 받아들였고, 유럽에서의 전쟁반대 저항운동은 계속됐다. 드골 이후의 정책이 이들을 거부했고, 맥스는 여러 번 체포되기도 또 코르시카섬으로 추방당하기도 한다. 결국 그는 다시 프랑스를 떠나고, 미군의 유럽본부가 있는 독일 하이델베르에서 그의 RITA운동은 계속된다. 국제 미군 GI의 저항운동의 한 역사를 그는 “US-ARMY – EUROPE (Max Watts, 1989)”이란 책에서 기록한다.

독일에서 그는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하며 뉴스주간지인 슈피겔(Spiegel)이나 슈테른 (Stern)에 글을 쓰기도 했고 또 일간지인 타츠(taz: Tageszeitung)의 공동발기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적이기도 했다. CIA가 자신의 전화를 불법적으로 도청했다는 사실을 증명해냄으로써 그는 다시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결국 CIA를 피해 독일을 떠나 호주로 밀항한다. 1980년대부터 불법체류자로 호주에 정착한 그는 자신의 삶 마지막 순간까지 부겐빌과 동티모르 또 파푸아 뉴기니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또 세계 곳곳의 원주민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 특히 카메룬 감독의 영화 “아바타(Avata)”의 모티브가 부겐빌의 이야기에 기초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맥스는 베트남 전쟁 당시 라오스에 떨어졌던 그 수많은 폭탄처리를 위해 단체를 조직해 돕고 있는 한 호주 군인에 관한 DVD를 2년 전 필자에게 보내줬다. 당시 필자가 살고 있었던 하이델베르그 근처 한 아름다운 산동네에서 그는 10년이 넘도록 살았다고 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자신의 젊은 날의 삶을 되 세기며 종종 얘기하곤 했다. 현재 위키리크스(WikiLeaks)가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듯 이 “underground” 저널리즘의 세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 할 만큼 이름나 있다. 그가 보낸 마지막 메일도 위키리크스에 관한 것이다.

맥스는 베트남 전쟁 당시 라오스에 떨어졌던 그 수많은 폭탄처리를 위해 단체를 조직해 돕고 있는 한 호주 군인에 관한 DVD를 2년 전 필자에게 보내줬다. 당시 필자가 살고 있었던 하이델베르그 근처 한 아름다운 산동네에서 그는 10년이 넘도록 살았다고 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자신의 젊은 날의 삶을 되 세기며 종종 얘기하곤 했다. 현재 위키리크스(WikiLeaks)가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듯 이 “underground” 저널리즘의 세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 할 만큼 이름나 있다. 그가 보낸 마지막 메일도 위키리크스에 관한 것이다.

Max Watts와 한 친구, photo: Sandra Bayer

그는 81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의 생을 보냈던 마지막 나라인 호주의 한 병원에서 평화로이 역경 많았던 삶을 마감했다. 맥스는 한 국가의 시민이 아닌 세계의 시민으로 평생을 전쟁과 제국주의와 또 어떤 억압에도 반대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독단주의와 종파는 거부했다. ‘그는 어디에나 있었다’라 할 만큼 거의 모든 주요 세계역사의 흐름에 가담했다. 즉 그의 이름처럼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한 인물이었다.

전쟁과 언론의 강경논리

 한국에선 한국참전 용사들만이 알려져 있지만 맥스의 얘기처럼 전쟁을 거부한 그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전쟁’이란 한 단어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수밖에 없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들의 이야기에 언론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9.11 당시 멕시코에서 만난 한 미군은 ‘어떻게 할거냐 이런 엄청난 사건이 터졌는데’라는 물음에 너무나 확실한 대답을 했다. “난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미쳤냐? 미국으로 돌아가면 전쟁으로 끌려갈 것이 분명한데? 난 가지 않는다.” 그 후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 참전을 피해 캐나다로 넘어갔다. 미국여론은 전쟁을 막지 못했다. 미국국민들은 미국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에 전쟁에 동의했다. 사실 전쟁은 미국땅이 아닌 아프가니스탄에서 또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것이라 전쟁합의에 그리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미국땅에서 전면전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다면 미국언론과 국민들이 그리 쉽게 전쟁을 지지했을까?     

한국언론들은 이번 북의 연평도 공격을 빌미로 전쟁으로 여론을 몰았다. 미국의 9.11 사태 당시의 미국언론을 흉내 내며 이 사건의 엄청남을 연일 보도했다. 전쟁이 비디오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한국언론들은 모르는가? 이 전쟁논리에 외국의 전쟁사례들을 동원까지 한다. 6.15 공동선언과 10.4 합의문을 이끌어 냈던 지난 정부의 성과를 뒤집어 오히려 유화정책이 전쟁을 부른 것이란 논리를 폈다. 한국언론들은 잊었는가? 부시가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 갈 때 세계의 많은 전문가들이 경고했다. 미국이 아랍세계를 너무 모른다. 이 전쟁 강행이 벌집을 쑤시는 결과를 초래 할 것이다. 평화는커녕 세계를 오히려 테러의 세계로 몰아 넣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부시의 무지한 강경책은 한국언론인들도 잘 알고 있다시피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도 인정하는 판에 유독 한국언론만이 강경책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조선일보는 이런 강경논리에 단연 선두주자이다. “전쟁을 각오하지 못하는 국가지도부가 전쟁을 부른다(조선닷컴, 2010 11월 30일)”란 주제로 이동복 전 국회의원의 기고문을 보도했다. 그는 “진정 전쟁을 회피하기를 바란다면 전쟁의 위험을 감당할 각오와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라 주장했다. 또 “독일의 2차 세계대전 도발도 영국 체임벌린 수상의 ‘유화정책’ 탓”이라며 말도 되지 않는 논리를 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세계를 그는 모르고 있는가?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유럽제국주의 국가들은 아시아에서, 아프리카에서 식민지쟁탈전을 벌여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가? 세계전쟁이 단순히 영국 수상의 유화정책으로 비롯됐단 말인가? 세계사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인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조선일보는 전쟁논리를 옹호하기 위해 북의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강경론을 수 차례 보도했다.

  • 이스라엘언론 “북에 급소 맞은 한국, 정대 피해야 할 모델” (권승준, 2010 11월 30일)
  • [한국이 공격당했다] ‘"北에 크게 맞고도 참을 수밖에 없는 한국…닮지 말아야 할 모델" (전병근, 2010년 11월 30일)
  • [戰線 지켜야 平和 지킨다] 이스라엘은 "눈에는 눈" (조의준, 2010년 12월2일)

하지만 조선일보는 이스라엘의 극우파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지 아는가? 팔레스타인의 독립된 국가설립이 평화로 가는 길임에도 이스라엘 극우파들의 강경한 태도가 이 지역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분쟁의 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가? 이스라엘이 이런 이유로 세계로부터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지도 알고 있는가? 이스라엘의 군인 장교들이 더 이상 이 의미 없는 전쟁을 할 수 없다며 공격을 거부했던 사실도 한국언론들은 알고 있는가? 군부의 저항운동 즉 RITA가 살아 있는 곳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전쟁을 거부한 이스라엘 군탈영자들과 전쟁거부자들은 여러 나라들을 다니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강연을 하고 있다.

한 전 이스라엘의 독일 대사는 한 TV 다큐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우리는 늘 핍박 받는 민족이었다. 그런데 이젠 우리가 핍박자의 위치에 서 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다”라고. 이스라엘에 많은 아랍인들이 살고 있다. 상대를 무조건 적으로 보고 죽여야 한다는 논리가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한국언론들은 알고 있는가?

“맥스가 떠났어요.”

북한의 연평도 공격으로 난리가 난 바로 그날 2010년 11월 23일에 전해져 온 소식이다. 60년 전 한국전쟁 참전을 거부한 그가 한반도에 다시 전쟁분위기가 찾아 온 날, 바로 그날 다시 한국전쟁을 거부했다. 전쟁을 부르는 한국언론을 뒤로하고 그는 죽음으로 평화를 찾은 것이다. 그는 또 한번 코레아니가 됐다. 그의 절친한 독일 친구인 노비는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CIA는 결국 그를 잡지 못했다. 그를 잡은 것은 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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